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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소개

소개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6년 2월 29일에 건립되었습니다.

동상 내용

일제 강점기동안 강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습니다.

김정한 선생 문학비

김정한 선생 문학비

순환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오르막길 끝지점에 위치한 키우미 숲 내에 있으며, 1978년도에 건립되었습니다.

문학비 내용

사람답게 살아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내용

김정한 선생은 1908년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에서 태어나 동래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에서 수학중 1932년 양산 농민봉기사건에 관여하여 피검되셨고 그 후 꿋꿋한 의지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수차례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1936년 사하촌이란 작품을 발표하고 잇달아 탁월한 작품활동을 하던 중, 일제 말기 뜻한 바가 있어 붓을 꺾고 지내시다가 끝내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버리지 못해 1966년 모래톱이야기로 문단에 복귀하여 수라도, 인간 단지, 산거족 등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민족문학의 새길을 전개하였고 그 공로로 부산문화상, 한국문화상, 문화예술대상, 문화훈장 등을 받으신 분입니다.

작품경향

김정한은 어느 작가보다도 치열하게 농촌사회의 현실을 현장속에서 깊이 투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이에 대해 결연하고, 정직하게 분노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은 한결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현실에 주목하고 있고,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그는 늘 시대의 중심에 서서 시대를 파악하고 분석하여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데 힘쓴 작가입니다.

주요작품

[사하촌] [모래톱이야기] [수라도] [인간단지] [어둠속에서] [삼별초] 등 입니다.

헌7학병 6·25 참전 기념비

헌7학병 6·25 참전 기념비

수변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6·25전란으로 국가가 위급하였을 때 부산의 모든 고등학교 및 대학교 재학생 중 1661명이 구국의 일념으로 1950년 8월 28일 육군헌병학교(현 부산동신초등학교)에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고된 훈련과 교육을 거쳐 1950년 10월 4일 전국의 격전지에 분산 배치되어 어린 나이로 빛나는 전과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큰 희생을 당하며 많은 동지들이 전사하였습니다. 제50주년을 맞이하여 살아남은 육군헌병학교 제7기 동지(헌7학병 동지)들이 학생으로 참전하여 이룩한 숭고한 조국 사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2000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이수현 추모비

이수현 추모비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0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어학교 아카몬카이에 유학 중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경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 위에 떨어진 일본 남자를 구출하려고 용감히 뛰어들었다가 달려오던 전동차를 피하지 못하고 꽃다운 스물여섯에 의롭게 숨진 그 넋을 기리기 위해 2001년 건립하였습니다.

사명대사 동상과 유정대사 충의비

 명대사 동상과 유정대사 충의비

가족친수공간(키드키득 파크)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후 부산지방에 머물며 왜인의 재침을 염려하시어 부산진성을 축조하신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리며 구국충의를 길이 전하기 위해 1981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하였으며, 2009년 9월 주변 정비공사를 착공하여 2010년 5월에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비각현황 : 1820년 부산진첨사 임형준 건립 → 성남초등학교(범일동) → 정공단(좌천동) → 1982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

사명대사(1544~1610)는 속성은 임이고 호는 사명당, 시호는 자통홍제존자, 속명은 임응규이고 유정은 법명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561년 승과에 급제하고 1575년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서산대사)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승군도총섭이 되어 평양을 수복하고, 의령에서 도원수 권율과 함께 왜군을 격파했다. 정유재란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 37년)에는 왕명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다음해에는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는데 이것이 전설상으로도 전해지는 그 유명한 ‘후시미성회담’이다. 이후 선조가 승하하고 나서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오늘날 호국불교라는 말이 있게끔 한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동상은 부산어린이대공원 가족친수공간(키드키득 파크) 건너편에 아늑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부산불교 연합회에서는 유정대사 추모사업으로 진작에 동상 건립계획을 결정지었으나 설치 장소를 물색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난산 끝에 1981년 현재 장소에 동상을 세우고 해마다 그 앞에서 추모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사명대사상은 높은 연화 기단 위에 입상으로 세워졌으며 기단부에 ‘홍제존자사명대사상’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바로 뒤쪽에는 대사의 발자취를 설명하는 명문과 건립취지문, 승병들의 전투 장면과 왜병을 꾸짖는 모습을 그린 부조를 두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유정대사충의비’가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 이 비석은 1820년(순조 20) 여름 부산진첨사 임형준이 유정의 활약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부산진성 남문 쪽의 제단인 정공단(부산시 기념물제10호)에 있다가 사명대사 동상이 건립된 시기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비각은 초익공에 팔작지붕으로 모로단청을 입혔다.

이곳은 지난날 사명대사와 같이 호국과 충의를 위해 밝힌 거룩한 횃불이 오늘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역사의 추모 현장이다.

박재혁의사 동상

박재혁의사 동상

수변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의 애국충정과 어떠한 난관에도 굽히지 않고 이겨나가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굳은 지조를 후손에게 영원히 남기기 위해 1998년 건립하였습니다.

인물소개

박재혁(1895~1921)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였으며, 1920년 8월 만주 지린성에 있는 무장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여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할 것을 지시받고 같은 해 9월 부산으로 들어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만나 폭탄을 던졌습니다.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시작하여 형 집행전에 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항일학생의거는 1940년 11월 23일 당시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제의 한국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불공정 판정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하였습니다.

동래중학과 부산제2상업학교를 중심으로 1,000여명의 학생들은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심판장 일본군 대좌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였으며, 그로 인해 학생 200여명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학생 15명은 투옥되었습니다.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항쟁한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고 선현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4년에 이 기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노다이 사건

1940. 11. 23. 구덕운동장에서 거행된 일제의 제2회 전력증강 국방경기 대회시 심판권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 배속장교들의 대회규정을 무시한 부정 판정과 민족차별적 농간 등에 대하여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항쟁한 사건으로 소위「노다이 사건」이라고 이라고 합니다.

본사건은 釜山市史(제1권 p1034 ~ 1040)에 수록되어 있으며 학계에서도 검증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노다이 : 부산병참기지 사령관(당시 경기대회 심판관)